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빈 롬멜 (문단 편집) === 최후 === 그 후 롬멜은 잠시 동안 이탈리아 방위사령관을 역임하다가 유럽지역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막는 [[대서양 방벽]]을 방어하는 B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 짧은 시간 동안 임시방편이지만 방어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다. 하지만 이때 롬멜은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데, 하필이면 연합군의 상륙 당일 폭풍우가 치는 것을 보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떠나서 작전 당일 전선이 아니라 본국인 독일에 가 있었던 것. 정말 롬멜이 불행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게, 노르망디는 날씨가 험하기로 유명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까지 심각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쳤다. 기상대에서도 6월 6일 당일은 날씨가 매우 안 좋을 것이라 예보했고, 날씨가 이렇게나 안 좋으면 연합군의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현지 지휘관의 대다수가 판단했고, 롬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안심하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가버렸다. 하지만 일기예보가 틀렸다.[* 훗날 롬멜의 부관에 의하면, 연합군의 상륙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귀환하면서 롬멜은 연신 "내가 어리석었어, 어리석었어!"라고 크게 분노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375995|출처]]] 그리고 당시 히틀러를 포함한 수뇌들은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은 벨라루스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라스푸티차|겨울동안 얼어붙은 땅이 봄철에 녹아 진흙탕으로 변하는 시기]]가 끝나는 6월 말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바그라티온 작전|소련군의 공세]]와 보조를 맞추어 실시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이 6월 초에 개시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롬멜의 귀국은 당연히 허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롬멜의 부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개 당시 독일군 지휘부의 2가지 중요한 문제 중 하나[* 나머지 하나는 히틀러가 늦잠을 자느라 히틀러 직속 명령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기갑사단이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가 되었다. 그리고 사령관 롬멜의 부재 중 B집단군 사령부를 책임져야 할 참모장 [[한스 슈파이델]]은 갈팡질팡하다가 이렇다 할 방편을 마련하지 못했고, 연합군의 상륙 이후에도 롬멜은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육군 상급대장과 갈등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돌만 장군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공석이 된 사령관 자리에 [[파울 하우서]] SS 상급대장이 임명되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훗날 독일군이 팔레즈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야전 지휘관이 하우서 장군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판단. 그뿐만 아니라 룬트슈테프와 반격작전으로 마찰을 겪었고 한편으로는 히틀러에게 서부전선에서의 불리함을 강조하며 최고사령부와 다시 한번 갈등을 겪는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와 롬멜의 관계도 크게 악화되는데 롬멜, 몽고메리, 패튼을 다루는 위대한 3인의 전사에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롬멜은 히틀러에게 계속 강화를 요청했고 아예 나중엔 히틀러에게 내 앞에서 당장 사라지라는 폭언을 듣기까지 한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롬멜은 계속해서 편지로 강화를 주장했지만 보어만선에서 다 짤렸다고. 다만 해당 서적의 1944년 롬멜부분은 롬멜신화를 정립한 이들의 증언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기도하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야전 지휘체계는 망가졌으며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회상한 말 그대로 인용하면 '''독일군 장병들은 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고,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944년 7월 17일, 전선 시찰을 나가던 중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스핏파이어라는 설도 있고 타이푼이라는 설도 있으나 독일측 목격자는 스핏파이어라고 증언했다. 일단 롬멜이 공습받은 지역에서 영국과 캐나다 공군의 스핏파이어가 독일군 차량에 기총소사를 가했던 것은 사실이다.] 영국과 미국의 특수부대가 롬멜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 암살 작전은 취소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전선에 있던 시절에도 롬멜에 대한 납치작전이 있었으나 실패로 롬멜이 그때도 경미한 부상으로 지휘소에 없어서 피할 수 있었다. 롬멜은 이후 사살된 영국군 특수부대원들을 높이 사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영국군의 납치작전은 대전기 내내 실패였으며, 크레타섬 주둔군 22사단장 [[하인리히 크라이페]]에 대한 납치만이 유일하게 성공했다. 이후 부상을 치료하던 와중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관련성이 제기되는데 암살자 그룹의 호파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의 주역이었던 슈타우펜베르크 백작과 친척관계였던 공군의 호파커 중령은 암살 미수 이후 체포되어 프라이슬러에게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와의 여러차례 미팅이 있었다는 점, 체포된 슈파이델의 애매한 진술,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서부전선에서 호응하여 파리 친위대 본부를 습격한 점, 지속적으로 히틀러에게 연합군과의 휴전을 제의했던 것으로 인해 히틀러의 의심을 사고 결국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실제로 롬멜과 클루게가 어느정도 암살작전에 연관되어있는지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감자이다. 그저 알려진 사실은 암살자 그룹이 영미 연합군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한 롬멜을 포섭하려고 수차례 떠보기 위한 미팅자리를 만들었다는 것, 총통 암살소식이 들리자 롬멜의 첫반응은 "감히 총통각하를" 이라고 극대노했다는 증언 정도이다.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훗날 자신들도 암살자그룹이 접촉했으나 거부했다고 자서전에 저술했지만 실제로 그룹이 직접적으로 암살 음모에 동참을 제시했는지는 패전 직전 게슈타포의 철저한 증거인멸과 이들의 회고를 입증해줄 음모 핵심 관계자들이 몽땅 처형당하면서 밝힐 방도가 묘연하다.] 1944년 10월 14일, 히틀러는 SS를 동원해 그의 자택을 은밀히 포위하고 연락선도 차단한 다음 국방군 인사처장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와 국방군 전쟁해군 해전지휘부장 빌헬름 마이젤을 보내 베를린으로 출두해 자신을 변호하든가 명예롭게 죽든가 두 가지의 선택권을 강요했다. 국민적 영웅인 그가 암살에 관련되어 재판과 처벌을 당하는 것은 정권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절대 좋지 않다고 여겨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식적으로는 영웅의 죽음으로 국장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며 베를린으로 출두하는 과정에 사고사로 위장한 암살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한 롬멜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고, 아내와 아들에게 그의 결심을 설명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후 아프리카군 원수 정복을 차려입고 SS 장교가 탄 메르세데스 차량에 동승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섰다. 롬멜은 헤를링엔과 울름을 연결하는 언덕길에서 동승한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의 지시에 따라 [[청산가리]] 캡슐을 음독하였고 그의 시신은 짜여진 각본대로 병원으로 이송된 뒤 게슈타포의 감시 하에 사인이 심장마비로 처리되었다. > 마이젤 장군이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해 같이 언덕길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약 5분 뒤 부르크도르프 장군이 마이젤 장군과 나를 다시 차로 불렀다. 롬멜이 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분명히 죽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군모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를 바로 앉히고 군모를 다시 머리에 씌워주었다. >---- >에르빈 롬멜이 자살할 당시 해당 차를 담당한 운전병 하인리히 도제의 증언[* 출처: 위대한 3인의 전사들 P511] 이후 장례는 약속대로 국장으로 치러졌고, 룬트슈테트가 추도식을 주도했으나.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고관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4.bp.blogspot.com/IMG_8026.jpg|width=100%]]}}}|| || {{{#000 롬멜의 데스마스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J30704,_Ulm,_Beisetzung_Rommel.jpg|width=100%]]}}}|| || {{{#000 포차에 연결되어 운구되는 롬멜의 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82.servimg.com/hpim5110.jpg|width=100%]]}}}|| || {{{#000 롬멜의 묘}}}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